예배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 됩니까?
뭔가 홀가분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은혜를 받았다는 기쁨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기쁨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가 기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기쁜 것인지...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그 뿌리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인도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분명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인생되기를 간구하는 새벽이 되길 원합니다.
1. 두 형제의 예배(같은 행동, 다른 중심) (창 4:3–5)
성경은 두 형제의 예배를 나란히 보여줍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 중에서 제물을 가져왔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왔습니다.
언뜻 보면 둘 다 자기 직업에 맞게 제물을 드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보면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 즉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을 드렸고,
거기에다 기름을, 그러니까 가장 좋은 부분을 함께 드렸습니다.
반면 가인은 그냥 소산 중에서 몇 가지를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가인에게 첫 열매라는 말이 없습니다.
아벨은 처음부터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마음에 정하고,
그 마음으로 첫 새끼를 구별해 두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진 열심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히 11:4)고 말입니다.
가인의 예배는 달랐습니다.
그는 일단 자기 소산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하나님 앞에 가져왔습니다.
농사를 짓고 수확을 했으니, 그중에서 얼마를 가져온 것입니다.
형식은 갖추었습니다. 절차도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주석가들은 이 표현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은 제물만 평가하신 것이 아닙니다.
드리는 사람과 그 제물을 함께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형식보다 예배자의 마음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의 말씀처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신
이 말씀대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기 합당한
예배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잘못된 열심이 낳은 분노(하나님 앞에서의 가인) (창 4:5–7)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크게 분노하며 안색이 변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분노가 정말 놀랍습니다.
자기 잘못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해 분을 터뜨린 것입니다.
이것이 착각의 본질입니다.
가인의 착각은 사과와 배를 어두운 데서 잘못 집어 든 것과 같은,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그는 내가 이만큼 드렸으니 하나님은 반드시 받으셔야 한다는
아주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리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겠다는 자기 과시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직접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6절과 7절입니다.
네가 분노하는 것이 어찌함이냐, 안색이 변한 것이 어찌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에서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웅크리고 있는 짐승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사자가 뛰어오르기 직전에 몸을 낮추고 있는 것처럼
죄는 자극을 받는 순간 즉시 튀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지금 당장 돌이킬 기회를 주고 계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선택을 올바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쌓인 교만이 분노가 되었고
그 분노는 결국 동생을 들판으로 유인하여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잘못된 예배는 그저 예배를 망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생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3. 죄의 무게를 모르는 자(가인의 뻔뻔함과 하나님의 심판) (창 4:8–16)
살인을 저지른 후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찾아오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말에는 반성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은
깨닫지 못하고 동생의 피가 스며든 땅의 호소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가인이 앞으로 어느 땅에서도
소출을 얻지 못할 것이라며 심판하십니다.
그제야 가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너무나도 잘못된 예배와
그의 행동을 바로잡으십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가인의 짧은 족보와
그 자손들의 삶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세상적으로는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며 살았지만
역시 하나님께 도전하는 백성들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문명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자손 중 라멕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벌이 칠십 칠 배나 내리기를 원한다는 교만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새 족보(예배하는 자들의 계보) (창 4:25–26)
하나님께서는 새로 족보를 써 내려가십니다.
아담이 다시 아들을 낳고 셋의 후손을 통해
믿음의 족보를 써 내려가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십니다.
아담이 다시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하와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셋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살인과 죄악의 역사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새로운 씨를 심으십니다.
그리고 셋이 아들 에노스를 낳는 때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의 가문이 도시를 세우고, 음악을 만들고, 기술을 개발한 것과 달리,
셋의 가문이 이룬 역사적 업적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는 것.
이 작은 무리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써 내려가십니다.
셋의 계보는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구원의 역사의 정점에
마침내 예수님이 계십니다.
결론. 믿음의 사람이 드리는 예배와 그 예배를 대하는 태도와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새벽, 이 자리에 나온 우리의 예배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가인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달랐습니다.
그는 양 떼를 키우는 동안 처음부터 마음에 정했습니다.
첫 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다.
가장 좋은 것, 가장 먼저 온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마음을 모은 것입니다.
그 예배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해 드러나는 열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예배의 자리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삶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족보를 쓰십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는 자들의 계보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계보입니다.
그 계보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벽,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드리는 예배의 태도와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예배, 내 열심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예배, 내가 인정받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온전히 서 있음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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