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장과 5장은 타락 이후에 계속해서 죄의 길로 빠져드는 인간과
그 와중에 셋의 후손을 이어가시면서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6장도 같은 맥락이 이어집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지난 5장에서 우리가 나눈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시 주신 셋의 후예들을 말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해 천사들이다, 왕 혹은 권력자들이다, 등등 설(說)이 많았으나
오늘날에는 다른 해석과 그에 따른 근거 자료들이 힘을 잃고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셋의 후예’ 정도로 신학계의 결론이 많이 기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아담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가인의 후예들, 즉 죄의 길로 빠져드는 인간이 아닙니다.
문제는 셋의 후예들이 가인의 후예들과 만나서 서로의 삶을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결혼은 강력한 결합입니다. 배우자와 삶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서로가 비슷해지고 심지어 같아지는 화학작용과도 같습니다.
결혼 한번 잘못했다고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결혼이 아닙니다. 그 엄청난 나비효과가 5절에 이어집니다.
5절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아시고...11절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우리도 잘 아는 이야기지만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함께 했을 때
비신앙인이 전도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보다,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똑같아 지기가 훨씬 쉽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본질이 죄인입니다.
(1절) 인간이 세상을 가득 채운만큼 악도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결국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6절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절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근심하신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단순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는 수준이 아니라
분노와 쓰라린 고통이 뒤섞인, 격렬한 아픔을 말합니다. 같은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야곱의 딸 디나가 추행을 당한 후 오빠들이 ‘근심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요나단이 ‘근심했습니다.’
자기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이 ‘근심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사건의 수위들이 벌써 강렬하지 않습니까?
단순한 걱정 고민이 아니라 괴로워서 데굴데굴 구르는 모양새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십니까? 하나님에게 고통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괴로움과 고통이 하나님 자신의 결정으로 인한 것 아닙니까?
누가 하나님 보고 인간을 만들어 달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만드셔놓고, 이제 와서 괴로워하고 데굴데굴 구르시다니요.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부족한 신이시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감정을 최대한 인간과 가깝게 설명한 말로써
인간이 이미 저지른 실수에 대해 '후회'하는 것과는 다르게 취급해야 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잘못 창조하셔서 빚어진 일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탄하고 근심하시는, 분노와 고통을 주체할 수 없어 아파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심판을 결정하실 때 결코 무감각하게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분노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고, 한탄하시고, 슬퍼하실 정도로 아파하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바로 그분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하네...’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구나!’ 가 보여야 합니다.
그분은 인간처럼 감정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공의(公義)입니다.
그분은 인간처럼 모르는 상태로 결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전지(全知)입니다.
그분은 무엇을 못하셔서 2안, 3안을 선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전능(全能)입니다.
- 그런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주십니다.
- 인간이 반역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저러시는 것이겠습니까? 아시면서도 기회를 주시기에 사랑입니다.
- 어쩔 수 없이 심판의 버튼을 누르시는 것이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심판은 최고의 구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고 그분의 신비입니다.
3절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
여기에서의 ‘백 이십년’은 이제 사람의 수명이 120년 밑으로 제한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홍수 심판 이후에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12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백 이십년’은 이제 심판까지 120년이 남았다는 하나님의 시한부 통보입니다.
심판의 선언인 동시에 은혜의 선언입니다.
인류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며 마지막 은혜의 시간입니다.
실제로 (5장의 마지막에 등장한) 노아는 그가 480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방주를 만들기 시작해서 120년 만에 완성했습니다.
그는 방주만 만든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온 세상을 향해 부지런히 외쳤습니다. (벧전 3:20, 벧후 2:5)
하나님께서 인간을 마구잡이로 쓸어버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은
심판이 오기 전에 구원의 길도 같이 준비하신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복음은 ‘그러나’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타락하고 죄에 빠지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몰살당하는 무서운 심판이 120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러나’라는 이 한 단어는 무서운 죽음의 물결을 가로막습니다.
그 복음은 인간 노아 개인의 훌륭함이 아닙니다.
(9절) 그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본문은 칭찬하지만 그것을 바로 뒤에서 설명합니다.
9절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마치 수백 년 전 믿음의 조상이었던 에녹이 죽음을 거치지 않고 산채로 승천한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칭찬입니다.
나의 의는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완전함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21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것이 바로 노아의 의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나고도 황당한 명령인데
노아는 어떤 토도 달지 않고 그대로 방주를 만듭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심판을 이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며 교제하는,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태초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뒤의 11절에서 분문은 노아로부터 시선을 돌려 이 땅의 모습을 다시 조명합니다.
11절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 부패는 자기 배를 불리려는 의지의 끝입니다.
- 포악은 우상입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의지의 끝입니다.
세대를 초월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1980년대 미국의 설교자 빌리 그레이엄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미국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소돔과 고모라에게 사과하셔야 할 것”
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남겼습니다. 그만큼 미국이 부패하고 포악하다는 성찰이었겠지요.
그런데 저는 문득 궁금합니다. 과연 한국 사회는, 한국 교회는 이런 말씀의 기준에 놓고 봤을 때
무사할까?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교회를 보았을 때 그렇기 힘들겠다는 슬픈 예감이 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자기 혼자 결정하려는, 선악과로부터 계속해서 내려온 타락한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방주는 그러한 인간의 탐욕, 인간의 노력을 정면으로 반대합니다.
16절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방주는 길이가 140미터, 폭이 20미터, 높이가 10미터인 거대한 상자입니다.
배가 아닙니다. 돛도 없고 노도 없습니다. 아무런 동력이 없습니다.
어디로 나갈지는 오로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18절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인간이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돛을 달고 노를 만들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구원하실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제2의 창조입니다.
무서운 심판의 경고 앞에서도 하나님은 살길을 내십니다. 구원의 약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노아처럼 그 하나님과 동행하심으로써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이 세대에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 가정이, 학교와 직장이, 이 지역사회와 나라와 민족이 구원받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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