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행진은 계속됩니다.
(33절) 기드온은 믿음으로 한 나라를 이겼습니다.
(34절) 그의 이야기는 한번 더 나옵니다. 몸도 마음도 약한 사람이었으나 강해졌습니다.
(33절) 다윗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33절) 다니엘을 위해 천사가 사자의 입을 막았습니다.
(34절)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 속에서도 멀쩡했습니다.
(35절) 사렙다 과부나 수넴 여인은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37절)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히스기야 왕의 아들이었던 므낫세 왕이 이사야 선지자를 이렇게 잔혹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위대한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없는 어리석은 아들에 의해 참혹한 역사가 기록됩니다.
(37절) 칼로 죽임당했다는 것은 아합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인 일을 떠올립니다.
(36절)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
(37절) 돌로 맞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고
(38절)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서 떠도는 삶입니다.
이런 그림은 구약은 물론이고 신약시대에도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당한 고난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도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핍박당한 적이 있었고
아직도 북한에서는 우리의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시대는 지나가는데, 믿음을 가진 이들이 당하는 고난의 모양은 동일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러한 세대를 초월한 다양한 박해를 언급하는 이유는
선조들이 그러한 극한 상황과 부딪히는데도
(39절a)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39절b) 그들의 마지막까지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얻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솔직히 맥이 빠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견디고 버티고 참고 인내해서 무엇인가 보상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참다가 끝나다니요.
여기까지는 세상의 안목이겠지만 우리는 그 이상을 봅니다.
그들이 얻지 못한 것은 당대에 무슨 약속이 이루어지고 승리를 하고 부흥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혹은 목회자들이 착각하고 욕심부리는 부분도 이 지점입니다.
내 임기 중에 무엇인가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보겠다고 전력투구합니다.
담임 사역, 교구 사역에서 욕심을 부립니다. 교육 부서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진정성이 아니라 기술의 영역, 매니지먼트의 영역으로 목회를 가져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임기 중에 가시적인 성과가 생기면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의 평가를 받습니다.
심지어 성과를 내놓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역자를 교체하는 속도가 빠른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히브리서의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눈에 보이는 결과물 없이 세상을 떠난 선배들은 다 무엇이 됩니까?
다 실패자들입니까? 다 무능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행진이 가시적인 영역에만 해당하는 것이라면 세상의 기업체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나 (40절) 더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말은
종말론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종말의 그림자를 봅니다. 저자가 ‘온전함’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버티고 하더라도 결국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며 그때는 종말의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전 13:12)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은 완성 되어가는 단계이지만, 종말의 때가 되면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온전은 믿음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단어입니다.
실제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오시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증거는 받았지만,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고, 계속해서 믿음의 행진이 이어질 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행진의 끝에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선도 당장 내 눈앞의 결과물이 아니라 종말론적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삶도 사역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장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해도,
내가 당장 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해도, 내가 당장 이 부서를 부흥시키지 못해도,
내가 당장 이 교회에 눈에 보이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다음 사람에게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겠다는 심정으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결국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때에, 내 방법대로, 심지어 나의 때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시한부 종말론을 부르짖던 이단 사이비의 교주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왜 내가 원하는 때에 강림하셔야 한단 말입니까?
건강한 종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이처럼 섣불리 욕심부리고 실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흥도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40절)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종말의 때에) 준비하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자기들의 삶으로 믿음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온전함을 이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내 삶도 사역도 다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세상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우리 선조들의 믿음의 행진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광스러운 행진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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