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갑옷을 입는다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겉으로 보았을 때는 무력하게 죽은 어린양과 같은 죽음이었지만
그 속에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오묘한 계획과 목적이 있었습니다.
계획이 없이 마구잡이로 싸우는 전쟁이 어디에 있습니까?
더군다나 인간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달게 받고 희생하겠다는 그 놀라운 이야기에
어떻게 깊은 뜻이 없겠습니까?
예수님의 모범처럼 이 편지를 받는 교인들도 마음을 무장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서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으나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계속해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무장 없이는 싸울 수 없습니다.
(3절)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 같은 세상의 파도와 맞서서 싸우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어갈 사명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1절)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렇다면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떻게 마음의 무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절을 ‘고난 자체가 영혼을 단련한다’는 유대인들의 믿음처럼 보는 시각도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베드로전서의 맥락대로 본다면
이 ‘육체의 고난’은 1차원적인 박해나 시련이나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연합했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연합한다고 하면 배우자의 아픔이 곧 내 아픔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남편이 아픈데 아내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아내가 힘들고 고민하는데, 남편이 나 몰라라 한다면 참된 부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연합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까지 인도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그치고 이긴 승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2절)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제는 예전의 방식과는 영원히 이별입니다.
(4절) 세상은 우리를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이상히 여겨서 비방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고난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싫어합니다. 외면합니다.
그렇기에 신자들이 불신자들의 조롱과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 악한 삶을 멀리했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악한 삶을 멀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실제로 이 편지를 쓰는 베드로는 물론 그가 살던 시대의 일반적인 교인들은
정말 예수님께서 시기적으로 곧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세상의 유혹을 무슨 재간으로 이겨내겠습니까?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6절의 말씀은 아직까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심한 구절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주석을 비교 대조해 봤으나 역시 대략의 합의점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보통의 본문 주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주석을 비교 대조해 보면 어느 정도 해석의 비슷한 흐름이 형성되며
소수 의견이 있더라도 큰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6절처럼 주석마다 의견이 갈리고 의견끼리의 거리도 멀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시간 관계상 모든 해석을 진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억지로 해석, 적용을 한들 여러분의 묵상에 큰 의미가 있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아래
6절을 다루는 것은 이 설교에서는 생략함을 알려드립니다.
설교자의 부족함이라 여기고 양해해 주시고 다음에 여러분과 함께 깊이 있게 나눌 기회가 꼭 있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사방에서 박해가 있었고 (4절) 세상이 극한 방탕으로 달음질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 문 앞에 당도해 있다는 결론은 당연했습니다.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 사도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8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3절에서 말하는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우상숭배를 보십시오.
성적인 부도덕, 더러움, 절제하지 못하는 욕심, 난잡한 파티, 통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꼭 로마 시대에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세대는 얼마나 떳떳합니까?
말세가 왔다고 하는 현실을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4절) 극한 방탕, 극한 쾌락으로 치닫는데
(3절) 사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살라고 합니다.
(우리말 근신(謹身)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술에 취해있다는 말의 부정어(否定語)입니다.
즉 직역하면 정신을 차리라! 술 취하지 말라! 기도하라! 정도로 보면 무리가 없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네 뜻대로, 네 기분대로, 네 멋대로 살지 말고
주의 뜻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갈고 닦은 개인의 영역은 결코 개인에서 멈추지 않고 공동체를 향해 확대합니다.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10절) 서로 봉사하라
사도는 서로 대접하고 봉사하라고 권고합니다. 대접한다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서로’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대접과 봉사가 공동체 안에서 풍성하게 일어남입니다.
집을 개방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원망 없이’ 하라고 합니다.
왜 원망이 일어나겠습니까? 내가 받고 싶은 것이 있고 기대가 있는데,
받고 싶은 것을 못 받고, 기대가 무너지니까 원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접하고 봉사할 때도 원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원망이 일어나는 이유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을 대접하면서 나도 대접받고 싶고 남에게 봉사하면서 나도 섬김을 받거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원망을 없이하라고 처음부터 선을 긋습니다.
(10절)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애초에 봉사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지요.
(은사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나 자랑하거나 나를 드러내는 도구로 쓸 것이 아니라
선한 청지기, 즉 구원이라는 목적이 있는 청지기, 주인의 뜻을 따라가는 청지기처럼 봉사하라는 말입니다.
청지기는 종입니다. 하급자입니다. 주인이나 상급자의 뜻을 잘 알아채서 수행해야 좋은 청지기이지,
주인보다 더 드러나거나 주인의 뜻을 왜곡하거나 하는 청지기는 필요 없습니다.
은사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이를 잘 알고 아는 대로 사는 사람의 삶이 바로 사명자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이때에
세상의 유혹을 버리고 주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고 서로를 대가 없이 사랑하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여러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고, 여러분을 주님께서 기대하시고 있고,
결국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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