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베드로는 교회 전체에 주는 일반적인 권면을 마치고
5장부터는 교회를 이끌고 있는 장로들을 위해 특별히 권합니다. 장로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들의 태도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교회를 앞장서 섬기는 목사와 장로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목사도 설교권이 있는 장로 중 하나입니다. 호칭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가 아닌 이 말씀을 듣는 교인 여러분 모두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함께 나누어 봅시다.
2절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사도는 목회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나의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입니다.
지도자가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관점은 사역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내 양이라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끌고 가려 할 것입니다.
양들이 그 방향을 원하지 않는다면 내 의도와 양들의 의도가 늘 충돌해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입니다. 내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에
때론 양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혹은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이 아니기에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주인의 뜻을 부지런히 양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장로의 역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주님께서 목자장(4절)이시라는 표현을 씁니다.
목자장은 일반적인 목자들보다 훨씬 더 전문적인 지식과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뜻대로 목자를 선발하거나 해고할 수 있는 힘 있는 우두머리였습니다.
이 구절을 그릇 이해해서 목사인 나도 목자다, 착각하는 어리석은 목사들을 꼬집기 위해
모 목사님은 목사의 역할을 가리켜 ‘양치기 개’라는 표현을 쓰시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일부러 극단적인 표현을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자와 개의 차이는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맞먹으려고 하는 개에게
인간 주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집에서, 목장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목자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개가 자청하는 일입니다.
목자장의 하위 목자도 목자가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목자장에게 목자를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목자장이신 주님과 고용 목자인 나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내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입니다.
내 것이면 손해가 나도 내 속만 끓고 말 일이지만
남의 것을 맡았다가 손해가 나면 죄다 물어줘야 합니다.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습니까?
목사와 장로가 가져야 할 책임의식과 경각심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무슨 누릴 권위며 얻을 이익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쯤 되면 목사나 장로 직분의 기회가 왔을 때 고사하는 사람이 줄을 지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되고 싶어서 줄을 서는 교회라면 말씀에 대한 이해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몰이해자들로 우글거리는 바로 그) 교회는 깊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2절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기꺼이 하며
이어지는 문장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말의 원어는 ‘하나님의 눈으로’라는 표현입니다.
양들을 볼 때 내 눈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억지로 섬긴다는 말 자체가 ‘나는 원하지 않는데’ 한다는 말입니다. 벌써 내 시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한다는 말은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별다른 번역의 연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기꺼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인 영혼구원이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거기에 억지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남인) 내 마음이 들어가니 억지가 되는 것입니다.
2절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내 시각이 들어가면 그 종착점은 당연히 나의 이득입니다.
나에게 이득이 되냐, 되지 않느냐로 모든 것을 따집니다. 사람까지도 그렇게 대상화합니다.
온 세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죄인인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칫하면 사역도 그렇게 변질될 우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아니라 내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교인을 바라보면
- 나에게 유익을 줄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맞춰주려고 하고 눈치도 보고 하지만
- 나에게 유익을 줄 일이 없는 사람은 아예 제쳐버리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의 입장에서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상처받고 시험 드는 교인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신문 방송에 나오는 것처럼 대단한 부정부패, 비리, 추문을 저지르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죄는 세상에 드러난 죄이고, 우리의 죄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는 그들의 죄도 더러운 이득을 위한 죄이고,
우리의 죄도 더러운 이득을 위한 죄입니다.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도는 이러한 죄를 가리켜 더럽다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더러운’ 귀신을 생각해 봅시다.
원어 상으로는 같은 단어입니다. 마태, 마가와 누가는 귀신을 ‘더럽다’라고 합니다. ‘더러운 귀신’은 복음서 안에서 19번이나 등장합니다.
귀신을 가리켜서 왜 더럽다고 할까요? 귀신이 실제로 위생 관념이 없으니 그런 것일까요?
개인적인 귀신 들림의 역사를 보면 그런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시쳇말로 잡귀 수준의 역사라고 봐도 됩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진짜 무서운 귀신의 역사는 너무나 깔끔하고, 너무나 깨끗한 환경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수백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전쟁과 학살이 결정되는 곳은
대부분 청결하기 짝이 없는 정치 지도자들의 집무실입니다.
수많은 교인을 시험 들게 만들고 교회를 뒤흔드는 어리석은 결정은, 그리고 사건 사고는
깔끔하기 그지없는 종교 지도자의 목양실에서 벌어집니다.
귀신을 가리켜 ‘더럽다’고 하는 것은 가시적인 문제를 넘어 영적 본질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멀다는 말입니다.
‘더러운 이득’이라고 할 때 재화가 더럽다, 돈이 더럽다 같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고 나의 유익을 추구하는 죄인인 인간, 죄인인 나의 본성이 다 드러나는 것을 더럽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저자들에게 동일한 영감을 주셔서 하나님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더러움’입니다.
오늘 계속 양(羊)이야기가 나오니 우리에게 친숙한 양 이야기를 해봅시다.
예언서와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흠 없는’ ‘티 없는’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무슨 때가 안 묻어서,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나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구원의 뜻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결입니다.
하나 더 봅시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이마에 쓰는 관에 무엇이라고 새깁니까?
여호와께 성결, 하나님 앞에 성결입니다.
내가 드리는 이 제사, 내가 섬기는 이 사명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정결이고 성결입니다.
그 반대에 서 있는 악한 영의 역사는 멸망이고 죽음입니다. 그래서 더럽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으로 교회를 대하고 교인을 다룬다면 그것은 멸망과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이득입니다.
사도는 영적 본질을 꼬집고 있습니다. 과연 목사인 당신은, 장로인 당신은
나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3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지도자들이 더러운 이득, 자기를 위한 마음, 멸망과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는 또 한 번 우리의 시선을 교정(矯正)해줍니다.
3절에서 ‘맡은 자들에게’ 라는 말은 장로가 맡아서 책임진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장로들에게 ‘맡겨진’ 자들이라고 보아야 정확한 의미입니다.
원어에서는 좀 희한하다 싶을 정도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바로 ‘제비 뽑음’입니다.
‘제비 뽑아 (여러분에게) 할당된 자들에게...’라고까지 한다면
(문장상으로는 어색하고 뻣뻣한 느낌이지만) 가장 사전적으로는 정확한 번역이 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장로 여러분들이 지금 치리하고 있는 교인들은
여러분들이 무슨 권한이나 공로가 있어서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은혜로 받은 것일 뿐입니다. 라는 사도의 강조입니다. (마치 구약성경의 기업처럼,
실제로 헬라어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설명하는 용례에서 ‘기업, 유산, 부동산’을 사용합니다.
골로새서 1:12에서 성도의 기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교인을 할당해 주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받을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교인들보다 나은 존재여서는 더더욱 아니라,
오로지 은혜로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장하지 말라는 전개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4절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이사야 28:5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의 면류관이 되실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목자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바로 목자장 그 자체입니다.
목자장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계속 양들을 돌볼 수 있는 그 자체가 목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말세와 심판을 넘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주님, 시들지 않는 주님, 영원불변하신 주님께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긴 지도자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5절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6절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앞에서 장로들에게 들으라고 전한 메시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5장의 맥락을 보면 종말이 곧 다가올 것이고 교회의 위기가 올 것이기 때문에
장로들의 지도력이 요구된다. 장로들이 특별히 더 신경 써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장로는 하나님의 양 무리에게 섬김과 겸손의 모범을 보이라고 합니다.
교인들도 장로들의 모범을 따르라고 합니다.
사도는 왜 이렇게 겸손에 대해 강조합니까?
교회의 위기와, 종말과 대체 겸손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럽니까?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교만하려 합니까? 왜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합니까?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그들은 지금 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미래도, 가정과 교회의 미래도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시대입니다.
마귀는 이 기회를 타서 삼길 자를 늘 찾고 있습니다.
불안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이들은 마귀의 먹잇감이 되기 쉽습니다. 이러니
내가 무엇이라도 좀 나서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 그릇 발전해서 교만이 됩니다.
사도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서 보고 불안해하는 교인들의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왜냐하면 (5절)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일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겠다고 교만하게 나설 일이 없습니다.
목자장이신 주님께 맡겨드리고 나는 내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그 뿐입니다.
사도는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갔던 교인들에게 주신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인 줄로 믿습니다.
10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말씀 붙잡고 기도할 때 특별히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교인 앞에서 겸손함으로, 모든 염려를 내려놓는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로 교회를 세워가게 해달라고,
그리고 교인인 우리가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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