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삶은 도망의 연속이었습니다.
- 형인 에서를 피해서 하란으로 도망쳤고,
-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도 외삼촌 라반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 겨우 정착을 좀 하는가 했는데 이제는 아들들이 무서운 사고를 칩니다.
야곱은 더 이상 세겜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언제 누구에게 공격당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럴 땐 도망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차피 도망 전문가 야곱입니다. 익숙한 상황입니다.
1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급박한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벧엘은 세겜에서 남쪽으로 30킬로미터 거리입니다.
누군가 야곱을 공격할 목적을 가지고 추격한다면 단숨에 닥칠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 야곱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멀리 피해서 도망가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도망은커녕 (1절) 제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금방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야곱은 디나 사건 때문에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리더십을 크게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비열함과 신경질적인 모습이 34장 전반에 걸쳐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31절에서는 아들들과 입씨름하는 꼴사나운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이 시대는 지금 우리의 세상보다 훨씬 가부장적인 시대입니다.
- 아버지를 주인(主人)이라고 부르는 경직된 시대입니다.(창 31:15)
- 부모가 집에서 쫓아내면 자식은 나가서 죽어야 하는 살벌한 시대입니다.(창 21:10)
이렇게 가장의 권위가 절대적인데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대놓고 대들고 있습니다.
야곱의 권위가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분위기가 이 지경인데 또 위협이 닥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부리나케 도망쳐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놀랍게도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신속하게 순종합니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2절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명령합니다.
바로 앞장까지만 해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나 싶다가도
이런 부분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영적 감각이 탁월하다 싶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야곱의 모습입니다. 동시에 팔색조 같은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릅니다. 아무튼 지금 야곱의 선택은 탁월했습니다.
가족들 또한 야곱이 명령하는 내용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잘 순종합니다.
4절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우리가 아랫사람으로서 가족 중 어른이든, 직장 상사든, 선배든
윗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실행으로 옮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말과 실행이 서로 맞지 않아서 양쪽이 모두 난처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 이야기는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식으로 얼굴을 붉힐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직한 예도 있습니다. 윗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실행으로 옮겼는데 한술 더 떠서 말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드는 때입니다.
이야기를 한 윗사람도 매우 만족하는 예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말을 한 당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같은 방향에서 자기 일처럼 고민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윗사람의 말을 실행으로 옮기는데
아랫사람도 짜증 나고, 윗사람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일처럼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고, 윗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대체 왜 해야 하냐고 반문하신다면 그냥 혼자서 일하는 직업이나 자리를 찾아보실 것을 권합니다.
일의 ABC나 다름없는 부분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조차도 앞서나가는 이들은 기본으로 갖추는 개념인데
이 개념 자체에 대해 의문이 든다는 것은
‘내가 팔로워여도 리더의 마인드로 일해야 전체가 보인다’는 기본 개념도 갖추지 못한 채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몸과 마음의 폼 Form 이 굳어버려서 바꾸기 힘듭니다.)
지금 야곱의 가족들은 야곱과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내놓고 있습니다.
여자들에게 귀걸이는 장신구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부적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물건을 야곱이 먼저 내놔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아서 순종해서 내놓고 있습니다. 야곱이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이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명령에 야곱은 한술 더 떠서 방향을 맞춰 성실하게 순종하고,
- 야곱의 명령에 가족들은 한술 더 떠서 방향을 맞춰 성실하게 순종합니다.
이러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목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아까의 예처럼 윗사람의 마음에 쏙 드는 아랫사람인 셈입니다.
그 방향은 무엇입니까? 정화(淨化)입니다. 깨끗하게 함입니다.
그들이 우상을 버렸을 때 대부분의 우상은 세겜을 약탈할 때 노획한 물품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다 버리라고 하십니다.
아주 높은 확률로 라헬이 아버지 집에서 훔쳐 가지고 나온 드라빔도 이때 모습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야곱은 식은땀이 흘렀을 것입니다. (창 31:32) 외삼촌 라반에게 훔친 사람은 죽어도 좋다고 맹세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운명의 장난처럼 라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세상을 떠납니다.
드라빔 사건은 라헬 또한 아버지 라반을 닮아 보통내기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자기 계산으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시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저 ‘인생’일 뿐입니다. 유한한 호흡일 뿐이고 하루아침 안개일 뿐입니다.
인생의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야곱은 자기 힘을 빼는 법을 서서히 배우지만
안타깝게도 라헬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여전히 욕심덩어리입니다.
그녀는 끝까지 자기 힘으로, 자기 꾀로 무엇인가를 쟁취하려는 투쟁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끝에 허무와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아들의 이름으로 고백합니다.
(18절)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입니다. 그렇게 원했던 아들을 남편에게 낳아주었는데 자기는 죽음을 앞둡니다.
아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남편의 편애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동안 보냈던 수많은 질투와 욕심과 계략의 시간도 다 하룻밤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고 자기 힘을 뺀 인생이었다면 이런 고백을 할 리가 없습니다.
얼마나 허무하고 슬픈 이야기입니까?
라헬을 묻고 야곱 가족은 또 전진합니다.
야곱의 회개와 성결운동이 온 가족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는 가시적, 영적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합니다.
그의 회복에는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권모술수, 계산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위를 더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노아를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 맥락이 등장합니다.
노아는 그저 하나님께 순종해서 방주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위를 더해주시고 마치 태초의 인간처럼 모든 동물이 그에게 순종해서 방주로 나아오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망정이지,
방주를 만드는 것이 쉬울까요, 수천 마리의 동물을 방주로 데리고 오는 것이 쉬울까요?
후자를 생각했다면 노아는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자, 권위는 자동으로 부여됩니다.)
야곱은 집안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정결하게 하도록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정결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집, 벧엘을 향하면서 모든 것을 경건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대단한 의지입니다.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 가족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서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세겜 주변의 수많은 부족들이 야곱 가족을 경계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언제든지 거짓으로 남을 속이고 칼을 들고 덤벼드는 사람들이라는 나쁜 이미지를 무슨 수로 지웁니까?
일일이 돌아다니며 설득하고 진정시키고 뇌물이라도 줄 참입니까? 어느 세월에 그렇게 해서 안전을 도모하겠습니까?
저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으니 우리가 머릿수로 밀어붙여서 애초에 위험 요소의 싹을 제거해 버리자.
어차피 야곱 가족은 멀리서 온 이방인들 아니냐. 는 식의 생각을 하는 부족도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과도 일일이 싸울 참입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변 부족들이 야곱의 가족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쉽사리 추격전을 벌이지 않습니다.
야곱 가족은 세겜을 떠나 안전하게 벧엘로 향합니다.
8절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29절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드보라는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올 때 하란에서 리브가와 함께 넘어왔을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이제 야곱의 집안에서 하란과 연결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리브가와 레아와 라헬과 몸종들이 모두 하란에서 온 사람들이기는 하나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결혼한 이상 그녀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드보라는 다릅니다.
창세기의 저자가 리브가의 죽음이 아니라 드보라의 죽음을 굳이 선택해서 이야기한 것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란과의 마지막 연결이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 이삭도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야곱에게는 모셔야 할 아버지도 없고, 눈치 봐야 할 어른도 없습니다.
내가 가장입니다. 내가 가장 어른입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35장을 통해 창세기의 저자는 한 세대가 저물고 다음 세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세대는 바뀌고 시대는 지나지만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언약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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