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이제 이삭의 시대입니다. 그가 가장입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21절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런데 의기양양하게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부딪힙니다.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21절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예전에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불임이라는 난관을 마주했을 때
부부는 첩을 들이는 방식으로 우회하려 했습니다.
인간의 방법입니다. 심지어 아내 사라가 이 방식을 적극 추천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사람의 방법으로 하다 보니 사단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 가족이 겪은 우여곡절은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스마엘도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셨으니 망정이지
참 상처투성이 어린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누구를 탓해야 한단 말입니까?
똑같은 역경을 만난 이삭과 리브가의 믿음은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어머니 사라보다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돈독했고 기도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매우 강했다는 증거입니다.
이삭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은 무리하게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오판을 이삭은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일이니 당연히 하나님과 이야기해야 합니다.
영적 감각이 뛰어났던 셈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결국 그 선택은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기도한다면 그 자체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에 복된 길입니다.
22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본문이 굉장히 속도감 있게 지나가니까 우리가 인식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자녀를 위해 무려 20년을 기다렸습니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겠습니까? 정말 별 짓(!)을 다 해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20년이나 기다린 일이 꿈처럼 이루어졌는데 마냥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리브가는 지금 태아 때문에 아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희망은 절망이 됩니다.
‘내가 어찌할꼬?’ 에 해당하는 원어는
‘내가 왜?’ ‘내가 어째서?’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사전적인 의미입니다.
내가 왜 임신을 위해서 기도했단 말인가? 정도의 후회라고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우리의 삶이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의 과업을 해낸다고 인생이 평안하게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낸 일 때문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거나, 아니면 다음 과업이 똬리를 틀고 기다리고 앉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세상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은 또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니 당연히 인생이 피곤해지는 결과로 연결됩니다.
매번 문제가 다른데 매번 다른 답을 일일이 내놓으려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이 지점에서 놀랍게도 이삭과 리브가는 (22절) ‘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식과 동일하게 응답하십니다.
문제 자체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눈을 주십니다.
리브가가 임신 때문에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그것을 마법처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임신의 의미를 밝혀 주십니다. 눈이 열립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도 응답입니다. 참된 응답은 눈을 떠서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은 먼저 왜 리브가의 배가 편안하지 못한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주십니다.
쌍둥이입니다. 더 나아가서 쌍둥이의 문제는
너의 개인적인 문제 이상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리브가는 그녀 자신이 두 민족의 어머니가 될 정도로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삭도 리브가도
하나님의 뜻을 자신들의 온몸과 온 삶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이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은 두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다투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만
창세기에는 우리의 생각보다 가족 간의 다툼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가인은 동생을 직접 쳐 죽였습니다. 더 말이 필요 없습니다.
- 아브라함과 롯은 삼촌 조카 사이지만 재산 때문에 갈라섰습니다. 전쟁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가 나서야 살겠다고 겨우 다시 만납니다.
- 이스마엘은 동생 이삭을 비웃다가 사라의 눈 밖에 나서 광야로 쫓겨납니다.
이복 자식이어도 그렇지 광야로 내보낸 것은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무서운 어머니입니다.
- 야곱에게 장자권을 도둑맞은 에서는 동생을 죽이겠다고 울부짖습니다. 결국 야곱은 멀리 도망쳐서 20년 동안이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 요셉과 그의 형제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동생을 인신매매하는 무서운 형들입니다.
막장 드라마도 울고 갈 매운맛 가족들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갈등은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가족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면 얼마나 무섭고 치열합니까?
이런 극단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 가족 아닙니까?
그런데 왜 가족끼리 싸우면, 교회 안에서 싸움이 붙으면 세상보다 더 무섭게 싸웁니까?
가까우니 더 실망이 크고, 실망이 커질수록 더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살벌한 가족 투쟁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무한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지막지하고 무정합니다. 어떻게 가족들끼리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합니다.
이 때문에 홍수까지 일어나고 세상이 멸망하고 난리를 쳤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립니다. 죄의 대형마트입니다. 갖가지 죄가 난무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왜 이러냐, 가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난장판은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우리가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는 그럼에도, 인간이 이렇게 엉망으로 내달려도
신실하게 그분의 언약을, 구원의 약속을 지켜가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에서와 야곱 두 형제가 장성했습니다만 가족 안의 불안과 다툼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사람의 연약함을 봅니다.
28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부모는 자녀를 편애합니다. 길고 긴 비극의 시작입니다.
자기들의 편애 때문에 자식들이 산전수전을 겪게 되리라 알았다면 부모는 정신을 번쩍 차렸을 것입니다.
31절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야곱은 간사하고
32절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에서는 무지합니다.
지혜는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 부모도 한치 앞도 보지 못하고 자녀를 편애하고,
- 야곱은 장자권의 무게를 모르고 함부로 달려들고,
- 에서는 장자였으나 장자의 의미와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래나 저래나 모두 어리석은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산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는데,
- 천국을 모르는 사람은 허무한 것을 위해서 천국을 팔아 버립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나도 동참하게 하옵소서. 믿음의 행진이 끊어지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문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적 명문 가문 되게 하소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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