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우리는 살면서 많은 선택을 합니다.
간단하게는 아침에 무슨 옷을 입을까,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같은 사소한 것부터
어느 학교에 입학할까, 일자리를 어디로 가나, 같은 중요한 결정부터,
누구와 결혼하나 같은 인생을 좌우할 만한 무거운 선택까지, 수많은 선택의 연속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도 선택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새로운 이름을 주시기 전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의 탁월함이나 대단함도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의 시작에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안을 열어서 오늘의 말씀을 볼 때
아브람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은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11-13절) 아내를 타인에게 내놓았다고 하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경악할 일이지만
여성은 남편의 재산일 뿐,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3,000년 전의 관점으로 본다면
아브람은 그저 자기를 아끼고 지키려고 하는,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지극히 일반적인 범주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야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뿐입니다.
아브람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12장의 첫 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로 시작합니다.
그의 위대한 여정의 시작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절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세부적인 대사만 조금씩 바뀔 뿐, 방향은 한결같습니다.
위대한 역사의 변곡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영웅들을 부르시는데, 그들에게 주시는 부르심은
첫째, 지금 본인이 안주하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둘째,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운 길로 걸어가자는 것입니다.
그 길이 나만 잘되는 길이 아니라
(3절) 땅의 모든 족속이 나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엄청난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야곱도 같은 약속을 받았습니다.
- 숨어지내던 광야의 모세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 조용히 살던 기드온을 그렇게 부르셨고,
- 아직 소년에 불과하던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
- 신약으로 넘어와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명의 길로 보내실 때까지 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일어나라, 가자! 하십니다.
오늘날만 해도 내 고향을 떠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부모와 가족을 떠나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홀로서기를 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다 큰 성인인 자녀 때문에 부모가 대학교로, 회사로, 군대로 전화한다, 찾아온다. 따위의 황당한 이야기도 많이 들립니다.
우리 중 누구는 그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요즘 친구들이 정말 독립심이 없어, 혀를 차실지 모르겠지만
이 말씀을 들으시는 장년 분들은 어떠십니까? 자수성가의 살 떨리는 경험이 어디 쉬운 일이었습니까?
창세기 마지막에 나오는 야곱의 대사처럼 ‘험악한 세월’이지 않았습니까?
무용담이라고 자랑은 하실 수 있겠지만 다시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 모두 손사래를 치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아브람의 시대는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대중매체가 있고 통신이 발달해서 우리가 여행지를 알아보는 것처럼 미리 이것저것을 알아볼 수 있는 시대도 아닙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한 치 앞도 모릅니다.
유목민들이 있기야 하지만 아브람 가족이 애초에 유목민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고
(갈대아 우르나 하란은 고대문명의 중심지 격인 대도시입니다.)
가축이 있어도 그들이 겨우 가축들을 먹이겠다는 이유로 2,000km가 넘는 길을 여행하지도 않습니다.
(아브람이 출발한 하란에서부터 가나안 땅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만 그 정도입니다.)
단순한 유목민의 가축 먹이는 방랑기가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모험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
학교를 자퇴하고, 직장에 사표를 내고 갑자기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길로 가겠다고 나선다면
그것 또한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일입니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의 행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단은 그런 결정을 권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제시하시는 분명한 방향을 보면 됩니다.
1절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다짜고짜 일어나서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보여 줄 땅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땅으로 왜 가라고 하십니까? 그 땅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7절) 그 땅을 자손에게 주겠다 약속하시는데 그렇게 해서 무엇이 유익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복 받는 민족의 청사진, 그분이 원하시는 그림을 친히 보여 주십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대로 행합니다.
7절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8절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그 방향은 어떤 방향입니까?
가나안 땅은 어떤 목적지가 아닙니다.
거기에 도착하면 진수성찬이나 무릉도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우상들이 우리를 현혹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1차원적인 쾌락을 주시는 분이십니까? 신앙의 목적이 나 혼자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 누리겠다는 몸부림입니까?
겨우 그런 그것으로 생각하는 분은 우리 중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땅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제사장 나라를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 모두를 구원하시는 원대한 꿈을 꾸십니다.
이성 교제하자고 제안해서 한번 성공적인 데이트를 하면 그것으로 남녀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만남이 지속되기를 원하고, 결혼하고 함께 생활하고 자녀를 낳고 삶을 살아가며 함께 늙어가면서
계속해서 사랑하고 계속해서 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삶입니다. 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길입니다. 예배자의 길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목표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동행이 우리가 누리는 진정한 복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 말씀을 하시고 있고,
말귀를 알아들은 아브람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를 드립니다.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물론 그의 여정에 수많은 유혹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경로 이탈은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내 아브람을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그가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a. 인간의 언약은 상호 간에 언약을 지키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b. 그렇게 해서 서로의 이익을 지키려 합니다.
c. 어느 한쪽이라도 그 노력에 소홀하다면 약속은 파기됩니다.
a.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다릅니다. 그가 언약하시고 은혜로 이루십니다.
b. 하나님 좋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 인간의 유익입니다. 구원의 은혜입니다.
c. 인간이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은 주권적인 섭리로 끝내 약속을 완성하십니다.
제사공동체, 예배공동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제사장 나라,
세상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은 이제 아브람을 통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고 고백했던
닐 암스트롱(우주비행사, 1969년 최초 달 착륙)의 말처럼
작고 평범한 아브람의 첫발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꿈, 구원의 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동일한 은혜, 예배자로서 누리는 복, 확장하는 하나님 나라,
구원의 능력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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