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우월하시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실 정도로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사명자인 바울 자신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고난 당해도 오히려 기쁘다고 합니다.
자기 능력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2장에서는 감옥에 갇혀 있는 자기의 소명이나 출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그 일이
바울에게는 더 걱정이라는 진심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장에서는 이단과 헬라 철학과 율법주의자들로 말미암는 교회의 위기에
일일이 대응할 것이 아니라 (1절) 위의 것을 찾고 (2절)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땅의 것,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이들이 일어납니까? 왜 부화뇌동(附和雷同)합니까?
왜 교회 안에서도 왜 그런 사람들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일어납니까?
(5절) 탐심 때문입니다. 대단한 명분이 있는 것인 양 (9절) 거짓으로 자기를 포장하지만
본질은 자기가 통제하려고 달려드는 탐심이고, 자신이라는 우상을 숭배할 뿐입니다.
(11절) 차별을 해야지만 자기가 도드라지고
자기가 도드라져야지만 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나, 거기에 호응하는 사람들이나 본질은 탐심입니다.
(6절) 이 모든 것들의 결말은 하나님의 진노일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 정치의 영역으로 확대해도 똑같은 그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의 지적, 말씀의 기승전결과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습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보아도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목 놓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입니까?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혹은 자기 세대의 영향력에 혈안이 되어 있고 주도권을 놓치기 싫어서
메시지의 합리, 비합리성을 애초에 따지지 않습니다. 참과 거짓을 따지지 않습니다.
애초에 마이크를 잡는 것이 목적이고 시선을 끌어모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설령 자기 주장이 틀렸다고 아무리 증거가 나타나도 절대 마이크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이런 일은 자주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자주 보이는 일입니다. 역사는 놀라울 정도로 반복의 수레바퀴를 돕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전쟁이 나든가, 나라가 망하든가 하는 종말적 수준의 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마치 대홍수처럼 한 세대를 다 쓸어버리십니다.
그렇게 역사의 한 장(章)이 끝이 나면서 한 세대가 다 쓸려가고 전멸해야지만
겨우 다음 세대가 다음 장을 시작한다는 정해진 결론입니다.
이미 한국교회도, 한국의 정치도 그 수레바퀴에 올라섰습니다.
인간의 탐심과 어리석음은 결코 이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이러한 어지러운 시대를 뚫고 나오는 비결을 가리켜 사도는 ‘옷 입음’을 말합니다.
12절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13절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옷을 입는다고 할 때 옷과 우리 자신은 엄연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옷이 나이고 내가 옷일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하나의 옷을 반복해서 입게 될 때
놀랍게도 옷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해 주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아무 옷이나 입으면 아무 곳이나 주저앉고, 더러워져도 구겨져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집 안에서 헐렁한 옷을 입고 있으면 자동으로 몸가짐이 헤퍼집니다.
그러나 깔끔한 옷을 입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심지어 한 직종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으면 저절로 행동의 제약이 걸립니다.
직장의 근무복을 입은 채 마구잡이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제복을 입은 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들 그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성가대가 다른 교인보다 더 탁월한 존재라 할 수는 없지만
가운을 걸치는 순간, 몸가짐이 훨씬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변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의인이라 칭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롬 3:24, 롬 3:28, 롬 5:1, 롬 5:9, 롬 5:18)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로,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다 구원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 부분을 의의 옷을 입혀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롬 13:14)
그런데 여전히 내 안의 죄성(罪性)이 불쑥불쑥 올라옴을 느낍니다.
우리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대체 무엇입니까?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역설을 가리켜서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의 옷을 입었지만, 죄인의 속성은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화(聖化)로 이어집니다. 이런 어중간한 상태로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엡 4:13)까지 자라갑니다.
나는 누구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겸손한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온유한 사람도 아니고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누구를 용납하거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 벌거벗은 몸이 다른 이들에게 자랑할 수준도 아니고 창피하기 그지없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럴듯한 정장을 걸치면, 그럴듯한 가운을 입으면 제법 있어 보이는 것처럼
실제로 내 모습은 죄인이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분이 하신 것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13절 b)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의로 옷 입는 수준이지만
점점 그 의가 나에게 전달되어서, 완전히 나에게 스며들어서
옷과 나의 분간이 불가능한 상태까지 됩니다. 완전하신 그분처럼 됩니다. 완전해집니다. 성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길 위의 사람들인 셈입니다.
내 힘으로는 이 많은 덕목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치 한 번에 다 들고 가기 어려운 짐들을 이것저것 아슬아슬하게 들고 가는 모양새입니다. 나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14절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강하게 잡아주는, 온전하게 하는 능력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종말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치닫는 이 세상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라고 하고, 그분으로 옷을 입으라고 하니 위로는 되지만
여전히 우리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바울 당시 교회 안팎의 수많은 문제와 마주해야 했던 골로새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얼마나 불안합니까?
나 자신을 생각해도, 우리 가정을 생각해도, 교회를 생각해도 걱정이 앞섭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내용만 바뀌었을 뿐이지
염려한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사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합니다.
그 평화가 내 마음을 이끌면 (마음은 결정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내 삶이 그 평화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세상의 다른 잡다한 소리가 내 삶을 흔들지 못합니다. 염려가 떠나갑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앞의 1장에서 나눈 것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16절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절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세상이 어지럽고 숙제가 난무하는데 어떻게 한가롭게 시를 쓰고 노래를 부릅니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17절) 주 예수를 힘입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냥 평화가 아닙니다.
만물 창조의 근원이 되며 만물 위에 계시는 능력자, 권세자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오늘 '나의 보화를, 이 평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아무도 없으리라!'찬송한 것처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하고 견고한 의지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교회와 세상을 섬기시면서
이 어둡고 혼란한 시대를 돌파하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열매를 가득히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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