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제 말씀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평강의 지배를 받으면서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눈앞의 수많은 문제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어떤 일을 하셨나, 그분은 무엇을 원하시나 같은
본질에 집중할 때 오히려 문제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지향점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교회 안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 뻗어갑니다.
왜 세상을 향해 뻗어가야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동체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라고 하니까 교회만 생각하기 쉬운데
부부관계도 공동체입니다. 가정도 공동체입니다. 세상에서의 일터도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다가 죽지 않는 이상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人間))은 참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영어의 ‘Human’ 으로 대표되는 외국어는 결코 우리말 ‘인간’의 심오함을 담지 못합니다.
관계없이 홀로 사는 것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참된 인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사이가 없는데, 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인‘간’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좋다’고 하셨는데
유일하게 사람이 독처(獨處)하는 것이 보시기 ‘좋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붙들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신앙의 진정성은 무슨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골로새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삶에서 맺은 열매와 이웃과의 ‘인간’ 관계입니다.)
3장의 마지막은 인간관계의 핵심인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주종(主從) 혹은 노사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며
- 부모가 없는 자식이란 있을 수 없고
- 부모 또한 자식이 없다면 성립 자체가 안됩니다.
- 사람이 일하지 않는다면 당장 굶어 죽습니다. 일을 하러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누군가의 지휘를 받을 수도 있고 누군가를 이끌어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초적인 관계들은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피하려 한다면 – 결혼하지 않는다면, 자녀를 낳지 않는다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결정을 평생에 걸쳐서 사람들에게 계속 설명하거나 의문의 시선을 계속 감수하는 불편을 겪어야만 합니다.
아무리 인식이 개방적으로 변한 오늘날에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애써 괜찮은 척하는 사람과 / 대놓고 물어보지 않는 타인이 있을 뿐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 자녀가 없는 사람,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의문을 가집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심겨주신 창조의 질서는
우리의 전인(全人)에, 영혼육에 그대로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질서를 거스르면 인간은 (신앙과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불편합니다.
이미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창조 질서 앞에 서서 인간의 선택이라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봤자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가는 객기일 뿐입니다. 이렇게 시대정신을 빙자해서
창조 질서에 역행했다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역사는 그런 객기들의 공동묘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19절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좋은 부부관계의 열쇠는 바로 복종과 사랑입니다.
그 복종과 사랑의 모범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 같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20절 자녀들아...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좋은 부모자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과 사랑입니다.
그 순종과 사랑의 모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처럼 자녀들도 부모를 기쁘게 하라는 말입니다.
21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세대를 초월해서 동일합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실망, 기성세대에 대한 실망입니다.
그들의 유년기를 형성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부모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학교 교육이 문제다, 교회 교육이 문제다. 아무리 이야기를 하지만 착수(着手)가 틀렸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가정입니다.
반대로 모든 희망의 시작은 가정이며 특별히 자녀의 희망은 부모입니다.
아무리 학교 교육이 붕괴하고 엉망이라고는 하지만 반듯하게 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뒤에서 바르게 굳게 버티고 서 있는 부모가 있습니다.
아무리 한국교회가 위기다, 교회학교가 무너진다. 사람들이 떠들어대지만
제대로 된 교회학교 교육을 못 받는데도 신앙의 전수가 잘 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역시나 그 뒤에는 신앙인 부모와 신앙 중심의 가정이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틈만 나면 TV 시청에, 스마트폰에 빈둥거리는 부모를 매일 보는 아이들이
저절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환상에 가깝습니다.
자녀가 집 밖에서 하는 언행을 보면 그 부모가 집 안에서 어떻게 사는지가 환히 보입니다.
아이들은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부모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경우는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문제 아동은 없습니다. 문제 부모가 있을 뿐입니다.
문제 학생은 없습니다. 문제 교사가 있을 뿐입니다.
문제 교인은 없습니다. 문제 교회와 문제 목사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마냥 어린 것 같지만 창조의 질서가 그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고 모두가 구원받는 삶이라는 것을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혼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과 부딪힐 때, 내 부모가 전혀 내 영적 기대치를 채워주지 못할 때
자녀는 분노합니다. 그리고 낙심합니다. (원어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사도는 부모들에게 그렇게 자녀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22절 종들아...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좋은 노사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과 성실입니다.
그 순종과 성실의 모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만 바울은 (22절) 육신의 상전들에게…. 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종과 주인의 관계가 임시적인 현 세상의 질서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신앙이 깊어질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어차피 이 세상의 것은 다 지나갈 텐데 내가 공을 들여봤자 무엇하나? 하는 염세주의적 종말론입니다. 심하게 발전하면 순식간에 이단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바울은 ‘이 세상의’ 상전에게 순종하는 마음의 근본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결코 저세상 핑계 대면서 이 세상에서 삶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인간관계를 둘러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만족스러우십니까?
안타깝게도 나를 둘러싼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 아내가 남편을 복종할만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심해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만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가 있습니다.
-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만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노릇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 부모가 자녀에게 무한정 잘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녀라지만 너무 밉습니다.
- 내가 정말 존경할 만한 상사가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말하면 입만 아픕니다.
우리는 다 불완전한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쓸 때,
일상의 삶에서 사람에게 눈가림으로 하는 것이 아닌
마치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섬기는 마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개입하시고 우리 일터에 간섭하시고 도우시면서
복을 맛보게 하십니다. 관계의 복입니다. 인간의 복입니다.
24절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종은 받을 기업이 없습니다.
기업은 고사하고 당장 받을 일당이나 월급 같은 개념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인이 거둬줘서 밥 먹고 잠잘 수 있으면 다행인 존재입니다.
그런 종과 같은 우리가 주인의 기업을 받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세상일 가운데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의 밖에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세상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하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일임을 알고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받을 것이 내 몫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몫이 있습니다.
세상의 몫을 챙기는 그것에 너무 목을 맬 필요도 없지만
다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게으른 종말론도 위험합니다.
25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정말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외모는 변합니다. 단순한 사람의 외모만 가리키는 말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세상의 모든 것을 보십시오. 다 바뀌고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넘어
우리에게 영원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십시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참된 관계의 모범을 보이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복과 은혜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번호 | 제목 | 설교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
2733 | [8월 11일] 복음을 꽃피운 교회 (살전 1:1-10) | 2025-08-11 | 1 | ||
2732 | [8월 9일]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왕하 20:1-11) | 최종운 | 2025-08-08 | 9 | |
2731 | [8월 8일]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왕하 19:20-37) | 최종운 | 2025-08-07 | 8 | |
2730 | [8월 7일] 기도를 멈추지 마라 (왕하 19:1-19) | 최종운 | 2025-08-06 | 10 | |
2729 | [8월 6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골 4:2-18) | 손병호 | 2025-08-06 | 8 | |
2728 | [8월 5일] 아내들아, 남편들아, 자녀들아, 아비들아 (골 3:18-4:1) | 손병호 | 2025-08-05 | 10 | |
2727 | [8월 4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12-17) | 손병호 | 2025-08-04 | 9 | |
2726 | [8월 2일] 전교인월삭새벽기도회 | 최종운 | 2025-08-02 | 9 | |
2725 | [8월 1일] 진짜 믿음은 위기속에 드러납니다 (왕하 18:17-37) | 최종운 | 2025-07-31 | 8 | |
2724 | [7월 31일] 믿음으로 살아도 고난은 온다 (왕하 18:1-16) | 최종운 | 2025-07-30 | 13 | |
2723 | [7월 30일] 주님의 다스림 아래서 누리는 참된 부활 (골 3:1-11) | 전소리 | 2025-07-30 | 13 | |
2722 | [7월 29일] 성도의 가치관 전쟁2 (골 2:16-23) | 전소리 | 2025-07-29 | 13 | |
2721 | [7월 28일] 성도의 가치관 전쟁 (골 2:6-15) | 전소리 | 2025-07-28 | 13 | |
2720 | [7월 26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더니 (왕하 17:24-41) | 최종운 | 2025-07-25 | 17 | |
2719 | [7월 25일]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다 (왕하 17:1-23) | 최종운 | 2025-07-24 | 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