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나는 남들 앞에서는 고양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호랑이입니다.
자신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말을 바울 자신의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말은 바울의 말이 아니라 바울을 비방하는 대적자들의 말을
바울이 그대로 따라 한 것이라고 봄이 옳습니다. 바울의 비아냥으로 들립니다.
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10절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대적자들은 바울의 외형적인 모습까지도 험담의 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는 편지 속에서만 호랑이고, 실제로 만나보니 별것 없더라.
해야 할 말을 보는 앞에서 못하고 편지로만 큰소리치는 사람이라는 식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행동 동기를 곡해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1절)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고 있는데 이것을 한낱 무기력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반문하고 있습니다. 나 바울이 정말 그런 사람인가? 그의 내면 질문이고 혼란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싸우다 보면, 특히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을 싸우다 보면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맞는 말인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계속 듣고 있으면 그 말이 맞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시현상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참 불리한 싸움입니다. 마치 저쪽은 규칙을 어겨가며 엉망으로 경기하는데
나는 규칙을 모두 지켜가며 싸워서 경기까지 이겨야만 하는 시합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씨름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씨름이 정말 영혼 구원을 위한 씨름입니까?
나는 속상하고 가슴 아프고 억울하더라도 영혼 구원을 위해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는 세상의 방법대로 싸우지 않겠다는 바울의 선언이 2, 3절에 나옵니다.
2절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가리켜 (2절 a)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 즉
자기 유익을 구하며 = 동기가 불순하며 = 사람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육신에 매여있는 사람이다 보니 환상과 계시도 경험해 본 적도 없다고 합니다(12:1).
(이는 은사자들이 많은 고린도 교회에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 많은 은사자들을 입 다물게 할 수준이라면, 사도라면,
환상이나 계시 정도는 체험했었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인식이었습니다)
바울은 능력도 없고(12:11), 그래서 속임수를 시도하는 사람(12:16-18)일 뿐이라는 것이 적대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8절) 주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도의 권세가 있었다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12장에서 이 모든 자기의 억울함에 대해 조목조목 낱낱이 해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담대한 태도로 =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 증명하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바울의 부글부글 끓는 심정입니다. 바울은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주님께서 주신 이 권세를 마구 휘둘러서 사람을 망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사랑이라는 원칙을 지켜가며, 생명이라는 성경의 정신을 지켜가며 싸웠습니다.
끝까지 지켜야 할 선을 지킵니다.
우리가 흔히 진흙탕 싸움을 말할 때 이판사판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한국불교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 이판승은 참선을 통한 수행에 정진하는 일반적인 수행승이고
- 사판승은 주로 탁발하거나 잡역에 종사해서 사찰을 유지하는 사역승입니다.
고려시대는 가히 한국불교 역사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몽골이라는 강력한 외세의 침략을 겪으면서 불교계도 큰 위기를 겪습니다.
그 위기가 이판사판이라는 단어로 함축되었습니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무시무시한 몽골을 상대로 고려는 일곱 번이나 큰 전쟁을 싸웁니다.
(고려와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한두 번의 전쟁을 버티지 못하고 몽골에 정복당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도 대단한 분들임은 분명합니다. 일본은 자력으로 버텼다기보다는 태풍이 나라를 지켜줬습니다.)
전쟁이 나고 전 국토가 불바다가 되고 있는데 스님들이라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승군(僧軍)으로 지원해서 나가는데 이판승이 어디에 있고 사판승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진흙탕 싸움,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는 안되었는데 그렇게 닥치는 대로 싸우면서 수많은 스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공력이나 학문이 뛰어나서 나라의 재산이나 다름없던 이판승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 저잣거리에서의 섬김을 통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사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의 인재들은 보호해야 했는데 말 그대로 이판사판이다 보니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수많은 인재가 쓰러지면서 불교계 전체가 크게 주저앉게 되었고
결국 고려 말이 되어서는 수준 미달의 승려들이 우후죽순으로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불교계 전체의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타락한 불교를 새 나라였던 조선은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억압합니다.
결국 불교는 한반도에서 다시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합니다.
(수많은 역사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싸울 때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금도입니다.
전쟁은 끝날 수 있겠지만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결국 그 끝은 황폐함입니다.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슬픈 결과입니다.
세상 역사에서도 선을 지키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도 지키는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그 지혜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입니다.
1절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바울이 온유와 관용이라고 표현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냥 온유와 관용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와 관용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자기편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고, 적에게는 무자비한 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이요 덕목으로 여겨졌습니다.
(온유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이미 많이 설명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야생의 말, 거친 말을 재갈 물리는 것입니다. 훈련 시키는 것입니다.
애초에 성격이 유순해서 온유가 아니고
그 속에 불같은 열정이 있고 모든 것을 쓸어버릴 힘이 있는데
목적을 위해 참고 훈련하고 한 방향으로 갈고 다듬는 능력이 온유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온유는 기본적으로 힘, 열정, 난폭함, 분노, 화염 등의 이미지와
연관해서 생각하면 본래의 온전한 뜻에 가깝습니다. 진정한 온유는 힘을 바탕으로 합니다.
하나님도 그러시지 않습니까? 그분은 모든 권세 위에 뛰어난 분이십니다.
그분은 질투하기까지 타오르는 불이십니다. 그런데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십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내 사람에게는 잘해주고 적에게는 무자비하게 군다는 그것이
무엇이 어렵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 집안 식구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는 멋대로 굴면서 (관용도 못 하고)
- 집 밖으로 나가면, 회사 밖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온유도 못 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런 것만 봐도 말처럼 쉽지 않구나, 싶은 덕목입니다.
반대로 이 덕목대로만 잘한다면 세상에서 충분히 지도자가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빠진 일반적인 온유와 관용은 말 그대로 세상에서 말하는 처세입니다.
처세를 잘했을 때 세상에서 인정받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은 일반적인 온유와 관용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유와 관용입니다.
그 온유와 관용의 방법을 3절과 4절, 5절에서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3절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육신에 따라 싸운다는 말은 우리식대로 바꿔서 말하자면
나도 ‘세상 방법대로’ 물불 안 가리고 싸우겠다,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는 바울의 포효입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생각보다 훨씬 그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감정이 매우 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고 또 참습니다. 이 싸움이 세속적 차원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 차원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4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영적 차원의 싸움이기에 그래서 육체적인 것, 눈에 보이는 요소로 싸우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기로 삼아 싸웁니다.
5절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이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자랑에 근거한 모든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이론을 무너뜨리며, 모든 높아진 것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항해서 인간이 쌓아 올린 교만의 성채를 무너뜨립니다.
‘모든 생각’ 곧 인간의 계략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사람이 생각을 바꾸고 사람이 계획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역사(役事)입니다.
12절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바울의 대적자 중에서는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는 누군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듯이 바울은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글자로 보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만 그렇게 사는 것이 어디 쉽습니까?
우리만 해도 사람의 평가와 시선, 그들의 말에 얼마나 목을 맵니까?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수준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역사(役事)입니다.
13절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15절 우리의 규범을 따라…. 17절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절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바울의 선(線)을 봅니다. 그의 기준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숱한 외부의 위협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내부의 도전도 겪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황당한 비방을 당할 때마다 그는 늘 원점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곧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도 온갖 비방을 듣고, 선한 의도가 왜곡되기도 하고,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이 심지어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위하다가 생기는 일입니다.
이 순간에 주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 확고하다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온유와 관용이 아니라, 나의 온유와 관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입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이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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