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법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의도를 훨씬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말 ‘가관(可觀)이다.’ 볼만하다는 말은 그 현상이 실제로 볼만해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차마 봐줄 수 없는 형편없는 지경을 비난하고 싶을 때 오히려 그런 말을 쓰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차라리 욕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수치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역설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교인들을 일깨워주고 싶은 강한 의지를 꺾지 않습니다.
19절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그들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리석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리석다는 말은 실제로 지적으로 어리석다기보다는 하나님 안에서의 어리석음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숱하게 보아온 것처럼 자기 자랑,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어리석습니다. 그들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의 어리석음과 지혜는 하나님 안에 있느냐, 아니냐? 혹은
그분의 안목으로 보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세상의 기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 자랑을 앞세우고 다가온 어리석은 지도자들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의 표시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당신들이 과연 지혜로운 자들입니까?’
바울은 질문하고 있습니다.
20절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실제로 누가 눈에 보이도록 이렇게 나에게 행한다면 우리는 펄쩍 뛸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어리석은 자들
(이 표현이 세상의 기준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의 사도로 내세우고 자랑하면서 고린도 교회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차원의 이익을 취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지혜로운 것이지요. 영악하고 처세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중하게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끝은 멸망이기에 어리석습니다.)
즉 거짓 교사들이 자기들의 영혼을 종으로 삼고 영혼을 잡아먹고 영혼을 빼앗고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데도
그들을 좋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육신의 손해는 펄쩍 뛰면서 그보다 더 크고 중한 영적인 죽음 앞에서는 오히려 태연합니다. 어리석음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분별력을 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표현을 뒤집어서 하면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비슷한 표현은 여러 군데에 등장합니다.
16절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울 자신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지금 자신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고린도 교인 당신들이 자기 자랑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이니
내가 그런 방법이라도 써서 나를 용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바울의 역설법입니다.
그의 자랑은 (17절) 어리석은 자랑입니다. (18절) 육신의 자랑입니다.
세상의 방식이고 인간의 성취이고 힘과 특권이고 경험에 대한 자랑입니다.
22절 그들이 히브리인들이냐...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23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바울의 대적들은 자신들이 정통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신분적인 조건은 그 어느 것 하나 뒤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바울의 대적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많은 일을 한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업적만 놓고 보면 바울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구절절 읽었습니다만 내가 고생을 좀 했다. 이런 수준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다 죽을 뻔한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는데도 이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소소한 고생들은 얼마나 많았단 말입니까?
사람이 자기 고생을 열거하는 이유는 자기 자랑입니다.
내가 이런 많은 역경을 다 지나올 정도로 강하다는 자기 강함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릅니다. 약함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사람 중에 자기 약점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절대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속마음을 말하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은 처세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남이 한 것까지도 내가 했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내 능력을 포장해야 합니다.
내가 한 것을 남이 했다고 말하도록 두면 안 됩니다. 모든 조명을 나에게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 인생을 내가 이끌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이끌어왔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32절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절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낫노라
뜬금없이 이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나는 바구니를 타고 성 밖으로 도망가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는 바울의 자기 고백입니다.
수많은 자랑을 통해 자기의 본모습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못난 과거, 창피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드러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품은 것이 예수님의 마음인지 아닌지는 그의 자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28절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교인들 위에서 자기 자랑을 하고 권세를 부리는 강함이 아니라
염려하고 애타는 마음을 품는 약함이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는 원래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려 했던 강한 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광주리를 타고 도망가는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없어 보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약한 자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우리의 자랑도 약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낮아짐으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높은 사람, 세상의 기준으로 잘 나가는 사람 때문에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고위 정치인, 경제력이 있는 이들, 권세가 있는 이들과 손잡으면 반드시 부패했습니다. 역사가 그 증인입니다.
교회는 낮아지고 섬기며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부흥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낮아져야 하고 바울처럼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이 다른 눈에 띄는 자랑거리들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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