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당연히 그러하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만큼 교회가 사회의 신뢰를 잃고, 세대를 막론하고 교회를 떠나고,
심지어 교회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이 활개 치는 등
교회의 존재 의미를 의심받는 때는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교회가 무엇인지, 왜 교회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는 채로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전무후무한 위기의 때인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에베소서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은 심각해 보인다고 회피할 성질의 질문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는 자리에 교회의 생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교회가 이 혼란스러운 세대를 돌파하고 살아남기를 바랄 것입니다.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고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미 사도는 위의 질문을 통해 오고 가는 수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기의 영광을 누리고 사명 감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모임(그 모임이 좀 더 구체적으로 모양새를 갖추면 단체라고 합니다) 은 동기와 목적에 의해서 정체성이 규정됩니다.
왜 모였나? 무엇을 위해 모였나를 대답하는 것을 보면
그 모임이 무슨 모임인지 현재도 알 수 있고, 그 모임의 장래가 어떠할지 미래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교회가 왜 모였나? 그 시작이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 모이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과거와 미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까지 와서 일중독이냐? 꼭 무엇을 해야만 하나?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인정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역은 충분한 것이 아닌가? 라고 하십니다.
참 듣기 좋은 말이지만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병든 자, 죄인, 사회적 주변인, 죽어가는 자들을 모두 살리시고 제자리로 돌려놓으시고 위로하시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그들에게 반드시 ‘사명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이 땅에서 생애를 놀며 쉬며 유유자적하게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놀자, 쉬자, 여유를 가지자, 유유자적하는 오늘날의 시대 흐름과
예수님의 삶은, 사도들의 삶은, 오늘 우리가 만나는 바울의 삶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뻔하게 나와 있으나 우리가 일부러 외면할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할 때 예수님을 끌어다가 활용하는 식이지,
그분께서 정말 어떻게 사셨는지 그리고 나도 그대로 닮아 살고 싶은지의 마음은 없습니다.
이처럼 사명을 생략한 지나친 휴머니즘은 마귀의 놀이터가 되기에 딱 좋습니다.
최근의 예배, 설교, 찬양, 사역 등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핑계로
복음을 부드럽게 세련되게 덧칠하고 포장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교회 역사는 언제나 희생과 피와 순교로 이어져 온 것이지
결코 낭만적이고 달콤한, 세련된 무엇으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선포이지 구걸이나 설득이 아닙니다.
내가 선포를 받아들이면 구원 받는 것이고 거절하면 영벌 받는 것입니다. 다른 소리 잡다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야전병원의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병사들을 치료하고 난 다음 다시 나가서 싸우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지,
요양원처럼 죽을 때까지 간호를 받으면서 편안하게 있으라는 곳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인간에게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동물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사명이 있어야 인간이지, 사명이 사라진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마귀는 자꾸 우리 인생에서 사명을 지우려고 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정체성을 가르침으로써 바람직한 교회를 만들어 갈 것을 교훈합니다.
교회의 뿌리, 시작을 언급함으로써 나아가야 할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1. 과거 : 하나님도 없이 살던 소망 없는 우리 (11-12절)
이 편지를 받을 에베소의 이방인 성도들을 향해 바울은 11절과 12절에서 그들의 과거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12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바울은 이들이 과거에 하나님과 무관한, 소망 없는 존재였음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고, 그리스도 없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던 존재였습니다.
복음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구원받기 이전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은 존재인지 깊이 깨달아야 교회의 의미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현재 : 하나님의 집이 된 우리, 교회 (13-19절)
13절은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더 이상 멀리 떨어진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14절) 바울은 예수님께서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물어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던 율법의 장벽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무너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집에 속한 자들입니다.
3. 미래 :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교회 (20-22절)
20절부터 22절은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교회는 사람의 생각이나 문화, 시대정신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21절과 22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하나의 건물로 비유하면서,
이 건물이 성령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자라나 거룩한 성전이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론은, 교회가 곧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모여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시는 살아 있는 공동체입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적용.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 교회가 무엇을 회복해야 할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교회는 은혜로 세워진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기억은 교만을 막는 강력한 브레이크이며 안전장치입니다.
둘째, 교회는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화평이 되시고, 나눔을 허무셨기에 우리도 하나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나누고 차별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드러내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배제하지 않고, 사랑과 인내로 품어야 합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드러내는 거룩한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며,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야 합니다.
우리 삶과 관계, 말과 행동이 주님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의 조직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그 교회의 지체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며 동시에 책임입니까?
이 시대가 교회를 의심하고 조롱할수록 우리는 더욱 교회의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고, 세상을 회복시키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거룩한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함께 세워져 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이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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